나와 奉仕活動(봉사활동)하는 마음(태양회뉴스 7호-2001) > 나눔봉사

본문 바로가기

회원메뉴

쇼핑몰 배너

나와 奉仕活動(봉사활동)하는 마음(태양회뉴스 7호-2001)

관리자 2018-02-07 (수) 23:42 6년전 13538  

 

나와 奉仕活動(봉사활동)하는 마음

이사장 高橋公純(다카하시 고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다카하시라고 합니다. 저는 지금 한국말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잘 할 줄 모르고 발음도 나쁩니다. 한국말은 한 번 머리에 들어가면 입에서 잘 나오지를 않지요, 그래서 죄송합니다만 다음부터는 일본말로 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오늘 아무것이라도 좋으니 사회복지에 관한 말씀을 좀 해달라는 부탁에 의하여 이 자리에 왔습니다.


복지활동이란 머리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또 말로서만 할 수도 없는 것이고, 솟아오르는 복지에 대한 마음을 어떻게 實行(실행)할까? 하는 그 행동자체가 복지하는 인간의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행동하는 그 마음이 어떤 신념과 어떤 이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점이니까 오늘은 일본사람인 제가 왜 한국에 와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그 동기 등을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저는 일본사람보다 한국 사람들이 더 봉사활동 하는 마음이 강하지 않는가라고 생각합니다. 그 훌륭한 봉사정신을 가지신 여러분에게 별로 참고가 되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잠시만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금부터 28년 전입니다. 저는 그 당신 일본 토쿄에서 부도심지로 불러지고 있던 '이케부쿠로'라고 하는 곳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일주일에 2번 정도는 서점에 나가서 적은 용돈으로 책을 사든지 아니면 서점에 서서 책을 읽곤 했습니다.


어느 날, 서점에 가보니 박정희 대통령께서 저서하신 “민족의 저력”이란 책을 발견했습니다. “아! 이웃나라 대통령이 아닌가, 이분은 민중을 탄압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한 국가의 대통령으로 계시다면 어딘가 보통사람보다 훌륭한 점이 있겠지, 세계의 리더들을 아는 것도 필요한 일이니 한 번 서서 읽어볼까”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 책을 사서 읽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책을 읽어 본 순간 저는 아연실색하고 말았습니다. 그 속에는 일본이 조선에 행한 범죄 사실들이 적나라하게 적혀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 벌써 대학을 졸업한 뒤였지만 일본이 이정도까지 한국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었는가에 대하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낌과 동시에 일본사람의 피가 흐르고 있는 자손의 입장에서 이 점을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절감했습니다. 그 이후부터 서점에 들으면 한국에 관한 책을 모두 사오곤 했습니다. 큰 서점에 가보아도 한국에 관한 책은 2~3권 정도 진열되어 있을 뿐이었는데 저의 책장은 반년이 지날 무렵에는 한국에 관한 책이 50권을 넘었고 그로부터 3년 정도 지났을 때는 200권을 능가했습니다.


그 책속에는 그 당시의 조선에는 森林(삼림)은 1,600만 정보였고 전체적으로 국유림이 3/1, 사유림이 3/2였다고 하였습니다.


그 살림을 조선총독부는 권력을 이용하여 국유림을 3/2, 사유림을 3/1로 역전시켜 놓고 그 3/2의 국유림을 벌채하여 일본으로 가지고 갔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랬구나, 내가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의 산에는 나무가 적은 것을 보았었지, 그 산의 나무가 적다고 하는 것은 일본이 한국에서 나무를 가지고 간 결과인 것일까?


한국은 4월 5일이 ‘식목일’이라고 하여 휴일로 되어 있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일부러 그날을 휴일로 정하여 국민 전체가 산에 나무를 심는다. 이것도 일본의 나무를 벌채한 탓일까? 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픕니다.


그렇다면 10그루라도 20그루라도 한국의 산에 일본사람이 나무를 심어서 조금이라도 그 죄를 사과하자고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호소했습니다. 여기저기서 돈을 모여졌습니다. 

시골에는 형님이 농업을 하고 있어서 그 형님에게 「지금 작은 삼나무 한 그루에 얼마 합니까? 하고 물으니 ‘5엔’정도다」 그렇다면 계산상으로 삼나무 3천 그루 정도는 한국의 산에 심을 수 있게 됩니다. 저의 계획으로는 4월5일 식목일에 한국의 초등학생들과 같이 심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한국의 초등학교를 견학해보니 아직까지도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의 빈곤한 시절과 같은 상태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어떤 분이 초등학교에 오르간을 3대, 또 어떤 분은 10대 기부하자고 제안해 왔습니다. 순식간에 일이 진전되어 너무 확장된 탓으로 상층부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저는 승려로 출가하여 7년째였고, 아직 수행 중인 몸이므로 만약에 이것을 실행하면 승려의 목이 달아나고 宗門(종문)에서 추방당할 것을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설령 종문에서 추방당해도 일본사람의 피를 이어 받은 자손으로서 한국에 죄를 사과하는 편이 더욱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僧侶(승려)로서 목이 달아나는 것도 괴롭지만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안 상층부에서는 제가 하려고 하는 일이 너무나 방대하기 때문에 깜짝 놀라서 보통 정도라면 스승 선에서 끝인데 그 정도로는 손을 쓸 수가 없었겠지요. 그 당시 수행중인 저로서는 도저히 만날 수 없고 만나도 말할 수 없는 상층부의 사람과 상의하면서 “너의 훌륭한 계획은 잘 알겠다. 그러나 어른 僧(승)이 된 뒤에 해 달라. 우리들도 충분히 응원할 테니”라고, 결국 그 계획은 중지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제가 한국에 대한 봉사활동의 첫 시작이었습니다. 그런 후 제가 어른 승이 되어도 상층부는 약속을 지켜주지 않았습니다. ‘한국에 어떻게 해야 하는데, 해야 하는데’하는 생각만으로 무심하게 세월은 흘러가고 말았습니다.


저와 한국 사람인 내 아내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12살이 되면 승려로서 엄한 수행의 길로 들어서게 되고 어른 승이 될 10면 동안은 만날 수 없게 됩니다. 저는 부모로서 훌륭한 승려로 되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훌륭한 승려라는 것은 머리가 비상한 승려가 아니고 타인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가지는 승려입니다. 자! 어떻게 할까? 그러면 인간의 비참함과 쓰라림, 슬픔, 그것도 깊은 슬픈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우선 히로시마의 원폭 투하한 곳을 방문하고 다음에는 나가사키의 원폭투하 된 곳에 간 뒤 계속해서 한국의 히로시마라고 불러지는 경상남도 합천에 있는 원폭  진료서까지 데리고 갔습니다.


그곳에서 안영천 지부장과 만났습니다. 저는 지부장에게 부탁드렸습니다. “죄송합니다만 피폭자 중에서 제일 생활이 곤란한 집을 안내하여 주십시오” 지부장은 “알겠습니다.”하며 한 집을 안내해 주셨습니다.  

 

그 집에는 한 할머니님이 원폭피해로 인해 9년 전부터 침상에 누워만 계시며 고생하고 계셨습니다. 할머님은 우리 아이들이 내드린 과자를 맛있게 먹고 담배를 드리니까 또 한 대 맛있게 피우시고 계셨습니다.


여러 가지 옛날이야기를 주고받고 하던 중에 “할머님, 지금 무엇을 제일 하고 싶습니까?”하고 물었더니 할머님께서는 “하루 빨리 달이 뜨는 조용한 산에서 잠자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괴로움만 끼치는 자신은 하루라도 빨리 죽어서 저 고향 산에 묻히고 싶다는 것일까?


저는 마음이 찡함을 느끼면서 같이 동행한 한국 지인에게 이 할머님의 방을 아름다운 강산이 그려져 있는 벽지로 갈고, 새 이불을 드리고 또 할머님의 옷 외의 여러 가지 필요한 것을 사도록 비용을 건네주며 부탁했습니다.

또 안영천 지부장께서는 말씀하시기를 1년에 한 번 피폭자들이 모여서 한잔 마시면서 즐겁게 노는 야유회 예산이 없어서 고민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비용이 얼마냐고 물으니 그 당시 일본 돈으로 10만 엔 정도라고 하셨습니다.


300명이 10만 엔으로 하루를 즐길 수 있다면 별로 비싼 것도 아니었습니다. 전 그 자리에서 그렇다면 하고, 1인당 소주 1병 값을 더 추가하여 그 경비를 지불하였고, 이것이 제가 본격적으로 한국원폭피해자들에게 대한 봉사활동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그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약 14년간 매년 원폭피해자들의 지원은 계속되고 있으며, 또한 그 동안에 합천에 피폭자를 위하여 위령각을 건립했습니다.


저는 작년에 일본의 거주지를 한국으로 옮기면서 보잘 것 없는 저의 봉사활동이지만 이것을 이해해 주실 분이 나타나서 지금은 한국 사람과 일본사람이 서로 마음과 마음을 연결시켜 주기 위한 한일문화교류와 한일 가라오케 대회, 한국원폭피폭자에게 야유회와 8월 6일의 위령제, 그리고 부산 소재인 지체부자유아동원인 아이들의 집에 대한 원조, 서울 도봉구 내이 방아골 종합사회복지관의 지원, 경기도 포천 소재의 자혜원에 대한 자원봉사활동, 즉 목욕과 청소 그리고 도봉구 자원봉사센터 소속으로 행하는 시립 도봉노인종합복지관에서 점심식사 보조역할 등의 봉사활동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c32b8ba5c3656ade0c7c6322e9d10a4b_1518014301_2103.jpg
​[도봉 종합 노인 복지관 봉사활동 후 모습]

3dba349c44c43c0fb98362e59661b7a1_1518225007_4781.png
​[봉사 활동 모습]

그 외에 대만에서 2·28사건 희생자 분들에 대한 위령법요식을 7년 전부터 실시하고 있으며, 또 수해 피해 등 천재지변에 대한 원조활동, 연말 이웃돕기운동 등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태양회의 슬로건은 “어두운 한 구석을 비추자”입니다. 자기가 가진 힘을 모아서 될 수 있는 한 사회와 정치의 힘이 미치지 못한고 있는 곳에 태양과 같은 빛을 비춰주어야만 하겠습니다.


이 태양회의 역사는 일본에 소재한 혼노우지 주지로 있을 때부터 시작했는데 아직 13년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누가 보던 말 던, 누가 인정하던 말 던 상관없이 오직 한 구석을 비춰주겠다는 목적만으로 첫 시작할 때의 신선한 마음을 잊지 않고 지속하여 나아가고 싶을 뿐입니다. 이상 제가 한국에 봉사활동을 하게 된 동기를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한국과 한국 사람들에게 일본사람의 한사람으로서 죄를 사죄하는 뜻에서 하는 것뿐입니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 한 사실을 일한합병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의 이해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당사자인 한국 사람들은 누구 한사람 그런 말을 한 사람은 없습니다.


일본이 조선왕조의 궁궐 정면에 조선총독부를 세웠는데 그대부터 빼앗은 조선 사람들의 인명, 토지, 산림, 쌀, 지하자원 등등, 그것을 계산해보면 우리들 일본사람들이 몇 번 새로 태어나서 한국에 봉사활동을 한다고 해도 따라가지 못하겠지요.


그 점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은 비판할지도 모르겠지만 저로서 할 수 있는 데까지 봉사활동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 문은 방앗골 복지관 요청에 의하여 방앗골 복지관 직원에게 강의한 내용임)

 

 


포토더보기▶

일본 워커즈 코프 연합회, "태양회 방문 환영"(2)

일본 워커즈 코프 연합회, "태양회 방문…
by 관리자

일본 워커즈 코프 연합회, "태양회 방문 환영"(2019.3.25.)

워커즈 코프 연합회 서울 태양회 방문&n…
by 관리자

기념행사의 이모저모(2018.8.6.)

행복한 순간의 미소​​​​​​​​​​​​…
by 관리자

안중근 의사 순국 108주기 추모식(2018.3.26.)

이사장님, 안중근 의사 순국 108주기 …
by 관리자

[나눔행사] 쌀 기증(2018.2.6.)

[나눔행사] 쌀 기증(노원구 2018.2…
by 관리자

원폭평화전시관 2주년 기념행사(2017.8.6.)

원폭평화전시관 2주년 기념행사봉사단체 태…
by 관리자

(사)평화봉사단 해모음    대표자:고교목남 고유번호 : 778-82-00225 전화 : (02) 934-9828   팩스 : (02) 933-9828   이메일 : csh230@naver.com 주소 : 서울시 노원구 동일로 237다길 16(4층) 후원계좌 : 하나은행 290-910014-95105
Copyright © (사)평화봉사단 해모음.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