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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위령비 건립을 발원하면서(태양회뉴스 7호)

관리자 2018-02-08 (목) 10:31 6년전 4647  

3 .1 慰靈碑(위령비) 建立(건립)을 發願(발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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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 高橋公純


2002년의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가 내년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미국이나 유럽으로 가고 싶어 하던 일본 사람들이 년 간 230만 명이나 한국을 방문하고 있어 구미를 능가하여 해외 어느 나라보다 한국 방문이 제일 많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 開港(개항)된 한국의 인천 공항에 발착을 알리는 크나큰 전광판이 있고, 그 곳에는 40편의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만, 그 중에 15편이 일본이름으로 쓰여 있습니다.


일본의 긴자거리에 필적하는 서울의 명동에는 일본어 간판이 즐비하고 일본제품이 진열되어져 있고, 한국 전통의 도기마을 매점에 있는 상품은 달러와 원으로 된 정가표는 없고 모두 엔으로 표시 되어있습니다. 왜냐고 물어보니 일본 사람만 사러 오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일본 동경(도쿄) 아카사카의 번화가는 밤만 되면 한글 간판이 홍수처럼 보입니다. 일본 사람도 살 수 없는 이 일등 토지를 정말로 이렇게 한국 사람이 많이도 샀구나 하는 감이 들었습니다.


이렇게도 양국이 가깝고도 가까운 나라로 되었는데도 이번 교과서 문제에서 본 것과 같이 양국 간의 감정의 불똥이 튀고 있습니다. 한국 문제를 무심코 발언한 것만으로 도대체 몇 분의 장관이 일본에서는 목이 잘렸을까요? 이러한 일은 결국 무엇이 원인일까요? 그것은 그간의 지배자가 피지배자의 심경을 이해하지 않는다는 것. 사실 그대로의 실태를 조금도 모른다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다고 봅니다.


어느 일본 여학생이 미국에 유학 가서 한국 여성을 만났습니다. 그 한국 여성은 “우리 아버지는 일본어를 말할 수 있는데, 왜 그런지 아십니까?”하고 일본 여성에게 물었습니다.


“전혀 모르겠습니다”라고 일본 여성이 말하니까, 그 한국 여성은 4년 동안 한 번도 그 일본 여성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고 합니다.


1910년, 한국이 일본과 합병당한 뒤 36년 동안 일본의 경제적으로 독립국가에 일본어를 가르쳤습니다. 아니 한국 사람은 배우고 싶어서 배운 것이 아닙니다. 어떤 때는 일본 사람인 선생님이 곤봉을 허리에 차고, 때리면서 일본어를 가르친 것입니다. 일본어를 알고 있는 한국 남성들은 일본어 그 자체에 원념을 품고 있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현재 일본의 교과서는 가르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무지함을 한국 여성이 분노를 느낀 것이겠지요. 나는 과거 어떤 기회에 일본제국의 육군 장교출신인 사람과 태평양전쟁은 일본의 침약 전쟁인가 아닌가라는 논쟁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상식이 풍부한 종교단체의 간부였습니다만, 절대 침략 전쟁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젊었을 청년시대에 목숨을 걸고 싸운 전쟁이라는 체험이, 그것은 아시아 제국에 대한 침약을 위한 것이었다고는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겠지요.


태평양전쟁이라는 것을 피해국가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일본인으로서 그들에게 사죄해야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나라를 위하하는 위치의 사람이라던가, 일국을 대표하는 나라의 국가요인으로 되면 간단하게 사죄의 말이 안 나오는 것도 조금은 알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한국인과 일본인이 진실한 다음으로 사이좋게 손을 잡고 서로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한 번 더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되돌아보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그 대안으로 세가지점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일로는 「閔妃(민비) 虐殺(학살)을 생각해 봅시다. 한국 서울에 관광하는 사람은 거의가 북악산의 아름다운 산을 배경으로 서있는 경복궁이라는 건물에 발을 돌리겠지요. 경복궁은 1396년 이씨왕조의 太祖(태조) 이성계에 의하여 건립되어진 조선왕조의 正宮(정궁)입니다. 1920년, 이 정궁 앞에 일본은 총독부 청사를 지으려고 했을 때 정문이 방해가 되어서 부수려고 했습니다.


그때에 일본의 한 민예가인 야나기 씨가,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하며 울면서 이 역사적인 美景(미경)을 지닌 문을 부수지 말라고 호소하였습니다. 경복궁은 광화문을 정문으로 해서 15만평이나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제일 깊숙한 내부에 건천궁이 있고, 여기가 이조 26대 고종 부인이신 민가가 학살당한 곳입니다. 일본인 손에 의하여 살해당한 것은 명치 28년(1895년)입니다만 겨우 일본에서 독립되어 閔妃(민비)의 조난의 비가 세워진 것은 1954년입니다.


그것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쓰신 明成皇后(명성황후) 遭難(조난)의 地(지)라는  石扉(석비)가 이 아름다운 경복궁 한 구석에 있다는 것을 일본인은 몇 사람이나 알고 있을까요?


그 일은 李朝(이조) 末期(말기) 大院君(대원군)이라는 혁신적 정치가가 출현한 때부터 시작됩니다. 26대 高宗(고종)은 이 대원군의 아들입니다만 王位(왕위)에 오를 때는 11살이었습니다. 때문에 대원군은 攝政(섭정)과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만, 이 아들의 부인을 누구로 할 것인가 선택할 때, 지금까지의 일족 전체가 권력 투쟁하고 있는 것을 우려하여 대원군 부인의 친족 중에서 제일 무난하다고 생각되는 여성을 뽑았습니다. 그분이 閔妃(민비)였습니다.


그러나 민비는 실로 총명한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후에 「러시아, 청국, 일본정부의 고관들을 마음대로 조종한 여성」등으로 불러진 이 여성은 드디어 弑父(시부)인 대원군과 사이가 나빠지면서 정치의 실권을 남편인 고종에게 돌려받고 자신이 정치를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일본의 도쿠카와 시대 말기의 흔들린 것과 같이 이 이조 말리도 흔들렸습니다.


明治(명치) 28년, 일본은 청국과 싸워 시모노세키에서 조약을 체결, 반도를 얻었습니다. 러시아를 포함한 삼국 간섭에 의하여 반환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조선 반도에서 청국은 퇴거하고 일본 마음대로 될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강대한 러시아가 조선에 개입, 민비는 일본보다 러시아에 접근할 길을 택한 것입니다. 민비의 학살당한 원인은 여기에서 발생했습니다.


일본이 日·淸(일청)전쟁에서 이겼는데 조선은 러시아를 받아들이고 일본은 무시한다. 당시의 정세를 보면 일본은 화가 났고 초조하기도 했겠지요. 그 원흉은 민비에게 있다. 민비를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일본의 입장이 나빠집니다.


일본은 그때까지 公使(공사) 이노우에로부터 미우라 고로로 바뀝니다. 정치적 경험이 없는 육군 중장 미우라로 바뀐다는 것은 민비 암살의 포석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미우라 공사의 서울 着任(착임) 9월 1일이고 민비 살해는 10월 8일이었습니다. 왕궁의 돌입 계획으로 오전 4시였습니다만 여러 가지 이유로 60명의 일본인 장사들이 광화문에 들어온 것은 오전 6시를 지났고 밖이 뿌여었다고 합니다.


그 후, 閔妃(민비)의 유체는 바로 옆 산의 숲 속에서 이불로 쌓은 채 석유를 부어 불을 질렀다고 전해졌습니다. 閔妃(민비) 行年(행년) 45세였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독립 국가인 대한제국에서 왕궁에 새벽 녘 일본인 건달, 조선의 건달이라고 불려지는 사람들이 왕궁 깊숙한 왕 부부의 침전까지 흙발로 침입하여 왕과 왕자를 밀치고 황후전하를 말살하는 일이 있어도 될 일인가?


당연히 제국문제가 외었습니다만, 히로시마 재판소에서는 정원 무죄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내가 죽였다”고 자칭하는 일본인은 수 명 있었습니다. 그 자들이 하는 일은 雜貨商(잡화상)이나 약장수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물론 일본 육군 하사관이나 경찰관으로 되면 문제는 더욱 크게 된다. 그런고로 대략 건달이라든가 장사꾼으로 불러졌을 것이지만 일국의 황후가 일개 약장수에게 살해당했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이렇게 도 너무나 슬픈 역사라 하지 않겠습니까?


다음에 「3.1만세 사건을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이것은 일본이 한국을 지배한 36년 동안에 제일 큰 사건입니다. 일본이 한국을 합병시킨 것은 명치 43년(1910년) 8월 22일이었습니다.


초대 총독은 육군 대장 테라우찌마사다케, 이 사람이 일본 해군의 통보함에서 인천으로 상륙했을 때, 대장의 성장이었다고 하니까 처음부터 한국에는 무단 정치가 준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까지의 대한제국은 단순하게 옛날 국호인 조선이라 개정되어 조선 사람에게 남은 것은 복종인가 죽음인가 둘 중 하나이다.」라고 하는 테라우찌 총독의 말과 같이 강대한 무력을 배경으로 폭력적인 지배가 시작되었습니다.


초대 총독부의 최대 사업은 토지 조사 사업이었고 이 명목과 조사에 의하여 한국인 자신이 생활하고 있는 토지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안정된 생활을 잃어버리고 또 헌병이나 경찰로부터 탄압이 있으면 정말로 죽음을 각오하고 이것에 대항하는 이외는 없습니다.


한국의 각지에 의병이라고 불러지는 사람들이 일어서 대항하고 사회지도층은 해외로 도피하여 한국 임시정부를 만들어 대항했습니다.


그리하여 10년 후 1919년 1월 1일 26대 고종이 갑자기 죽습니다. 고종은 부인 민비를 일본인 손에 의하여 살해당하고 헤이그밀사 사선 네델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회의에 일본 탄압을 호소할 자를 파견시켰다고 해서 일본 정부에 의해 退位(태위) 당함에 의해 國恥(국치)의 슬픔을 맛본 분입니다.


이 高宗(고종)의 죽음이 일본인 醫士(의사)의 독살이라는 풍설도 돌아 한국인 반일감정은 이제 멈출 수가 없을 정도까지 와 있었다. 그리하여 3월 1일 고종의 國章(국장) 3일전 서울의 파고다 공원에서 한국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어지고, 그 선언서를 널리 배포하였습니다.


사람들은 태극기를 손에 들고 「大韓獨立萬歲(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고 물결 같이 행진했습니다.
이 만세운동이 전국에 퍼져서 200만 명의 사람들이 일어섰던 것입니다. 일본은 당연히 경찰, 군인을 동원하여 진압에 나섰습니다.


3월 1일부터 5월 말일까지 이 사건에 의하여 살해당한 한국인은 7천 5백 명, 부상자만 5천명, 체포당한 사람은 4만 6천명, 파괴된 민가 7백이라는 숫자가 남아 있습니다.


예로써 「수원 제암리의 학살」은 4월 15일 일본의 한 중위가 지휘하는 일개의 부대가 나타나 마을 사람들에게 訓示(훈시)할 것이 있다고 하면서 30여명을 교회에 넣고 창과 문을 잠그고 일체 사격개시, 당내에 있던 부인은 아이를 창밖으로 내보내고 “나는 죽어도 좋으니 내 아이의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부탁하지마자 일병이 그 유아의 머리를 찔러 죽였습니다. 이 교회는 그 학살이 끝 난 뒤 불을 질러 사체는 소각되어 버렸습니다.


일본 병은 만세를 부르는 젊은 여성의 오른팔을 자르면 여성은 왼팔을 올려 만세를 부른다. 일본 병은 그 왼팔을 잘랐다. 양팔이 없어진 여성은 그래도 입만으로 만세를 부른다. 일본 병은 그 입에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양심 있는 일본이라면 소름이 끼치는 듯한 잔혹 비도한 살인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한국의 잔다르크라고 불러진 유관순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서울에서 일어난 만세사건의 진상을 말하고 사람들에게 결기할 것을 재촉한 것입니다.


딸의 결의에 아버지도 어머니도 일어섭니다. 다만 순식간에 아버지도 어머니도 官憲(관헌)에게 살해당하고 유관순은 감옥에 들어가서 7년 형을 받았습니다.


유관순에게 한 장의 사진이 있습니다만 오른쪽 가슴에 유관순의 명찰을 집어 놓은 수인복을 입은 이 사진은 형을 받고 있을 때의 것이겠지요. 얼굴의 턱과 눈이 퉁퉁 부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고문당한 흔적일까요?


그러나 아직까지도 똑똑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만 유관순이 獄死(옥사)하여 감옥에서 나왔을 때 몸은 고문의 상처가 생생하고 이상 더 마를 수 없을 정도로 뼈와 가죽만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불과 17세라는 젊은 나이였습니다. 이 독립만세운동은 결국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암흑에서 암흑 속으로 묻혀버린 유관순과 같은 희생자가 얼마나 있었을 것일까요. 그것을 생각하면 일본인으로서 사죄할 말조차도 나오지 않은 것이 오랜 동안의 나의 심정입니다.


전후 일본은 나카소네 수상을 선두로 역대 총리대신이 한국을 방문할 때 일제 36년의 식민지 지배에 유감의 뜻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되풀이해서 묵살 당한 일본 대신급의 사람이 한국 문제로 실언 한 것에 의하여 그 자리를 잃어버린 것은, 아무런 죄도 없이 한국의 국민이 조국 독립을 위하여 단지 만세를 부른 것 때문에 벌레 같은 죽음을 당했었다는 역사의 사실과 아직 그 원념이 생명의 어느 한 곳에서 불타고 있는 한국인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는 무지함에 의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본의 막부말의 쾌동은 가영 6년(1853년) 패리의 來航(내항)에 의하여 시작되었습니다.
神州(신슈) 일본이라는 귀중한 국토를 당에게 짓밟혀서는 참을 수가 없다고 하는 야마토 민족의 독립심이 그렇게 한 것이겠지요. 국가의 독립심이라는 존중상은 일본에만 한한 것은 아닙니다.


일본에 불교를 전하고 수많은 대륙문화를 전해준 한민족에게도 허용되어도 좋은 것입니다. 그런 것을 어찌하여 대한 독립만세를 부르짖은 것뿐인데 7천 수백 명을 일본 사람은 죽이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요?


昭和(소화) 20년 일본이 전쟁에 패한 날에 조선 반도에는 70만 명의 일본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70만 명은 조선 2천만 명 위에 군림했다고 합니다. 이중에 정치인도 있었고 직접 탄압에 손을 쓴 군인도 있었고, 公理(공리)를 기반으로 한 평론가도 있고 아이들에게 훌륭한 인간으로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르쳐주는 교육자도 있고, 마을을 깨끗하게 하는 종교가와 불교가 있었지 않았나 봅니다.


이 사람들은 3.1만세 사건을 포함한 일제 36년 식민지시대의 반성문이나 사죄를 한 사람이 있었을까요? 전후에 불타버린 벌판 같이 되어버린 일본에서 사죄나 반성할 여지는 없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일본 경제가 세계의 톱 순위 급에 달해진 생활의 안정을 보고 종전직후보다 훨씬 더 정신적으로 여유도 생겼으니까 내정하게 사물을 보고 판단할 수 있었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런 시대가 왔어도 반성문이나 사죄한 뜻을 담은 저작과 글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국은 5천년의 역사 속에 13회나 걸쳐서 타민족으로부터 침략을 받았다고 합니다. 幸(행)인가, 不幸(불행)인가? 일본은 아시아의 東滿(동만) 위치하고 사방이 바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타민족으로부터 침략 당했을 경우의 부자유함과 슬픔, 쓰라림, 분함, 괴로움을 알 수가 없겠지요. 그러한 사실에 대한 경험으로는 자기 살을 마음껏 펀치 등으로 집어 올리지 않으면 모를 일이겠지요?


戰史(전사)라는 것은 승리한 나라보다 패배한 나라 쪽이 정확하다고 합니다. 식민지로 지배했던 자와 지배당한 자로서는 그 역사는 피지배자 측에서 본 것이 더 정확한 것입니다. 나라를 빼앗고 인간으로서 행복하게 될 권리를 빼앗기고 부자유함 속에서 전전긍긍해가며 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식민지하의 사람들의 심정을 잘 생각해 가면서 3.1만세 운동을, 그리고 36년간의 일제 지배의 역사를 봐야 하지 않을까요?


세 번째로 관동 대지진가 조선 사람 학살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大正(대정) 12년 9월 1일 토쿄를 중심으로 한 관동 일대에 대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이 지진에 의하여 사망자, 행방불명자 11만 명을 내고 12만 가옥 전괴, 44만 가옥 전소, 피해 인구는 348만 명에 달한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대 혼란 속에 내무부로부터 각 지방 장관 앞으로 “토쿄 부근의 진재를 이용하여 조선인은 각지에 방화하여 멀지 않아 불운의 목적을 수행했다. 현실로 토교 시내에서 폭탄을 소지하여 석유를 부어 방화한 조선인의 행동에 대하여 엄밀한 취조를 가하도록”이라는 무전이 날아갔습니다. 어떤 사람도 공항 상태였을 것이겠지요.
순식간에 유언비가 퍼졌습니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 “조선인이 평소의 원한을 풀기 위해 습격해 올 것이다. 카나가와켄의 주민은 거의 다 살해당했다.”, “조선인 囚人(수인)이 탈옥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 “총기를 가지고 조선인 200명이 타마가와를 건넜다”


이러한 조선인에 대한 유언에 대하여 일본인은 “무엇이라고, 올 테면 와라”를 감정이 고조되어져 마을에 자위단이 구성되어지고 경관으로부터 “조선인을 살해해도 상관없다는 지령이 나왔다”


“그러면 오늘부터 晴 天下(청 천하)에 조선인을 죽이는 것은 자유다” 그리하여 비극은 생겼습니다. 이것은 일본인으로부터 한국인으로부터도 보고서가 있습니다.


「카키쿠케코를 말해봐」 조선어에 없는 콧소리 나는 말을 조선 사람들은 잘 못합니다. 그것만으로 아라가와의 쪽에 세워놓고 竹槍(죽창)으로 차례차례 죽였다. 아라가와에 던져 버려진 자, 시뻘건 철판 위에서 굽혀 죽은 자, 철선으로 묶어서 집단으로 강에 떨어뜨린 자들, 부인의 배를 갈라서 태아가 나온 채로 살해당한 자, 나도 도저히 더 이상 상세하게 이 사실들을 쓸 수가 없습니다. 


겨우 닭이나 개나 돼지를 잡은 素人(소인)들이 아무 죄도 없는 무고한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그 살인은 “처참 이외는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불과 5일 정도로 토쿄, 사이타마, 치바, 카나가와, 토치기, 이바라기켄하에서 죽인 조선인 수는 6천 6백6십 명,(숫자의 차이는 한국과 일본의 큰 차이가 있음)


사법성 조사에 의하면 조선인으로 오인하여 일본인을 죽여 버리고 만 사람들이 기소 당한 그 숫자는 2백2십 명, 살해당한 일본인 86명, 이런 사실로 봐서도 공황상태였다는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끝나고 보니 일본인으로부터 도움 받은 조선인이 있었습니다. 공포스러운 것을 본 그대로의 체험을 무참하게 죽어간 조선인에 대한 동정으로 계속 기록으로 남긴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라들은 선량한 시민들이고 국민을 지키는 의무를 지닌 경찰, 그리고 군인과 정치인으로부터는 전혀 사죄도 반성도 없는 것입니다. 조선인을 天皇(천황)의 赤字(적자)라고 말한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정치를 이용하고, 정치권력을 사용하여 민족을 없애려고 하고,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고,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든다. 이것은 일본의 國恥(국치/나라의 수치)이다. 이러한 것을 일본 교과서는 가르치고 있을까요?
일본인은 부드러운 심정, 정 많고 따뜻함을 가진 민족이다. 그러나 과격한 시대를 지나는 중에는 실패도 있었다는 것을 솔직하게 가르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이상 세 가지를 써보았습니다.


일본이 조선반도에 4척의 군함을 띄어 위협해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것은 1876년입니다.  조선 측에서 보면 이 때부터 일본이 반도에 대한 횡포가 시작되었습니다. 1945년 終戰(종전)을 맞이할 때까지 약 70년, 이 70년 가운데 3.1만세 운동 관동 대지진를 포함하여 일본인은 전체 조선 사람을 몇 명이나 죽였을까요?


그런 과거에는 눈을 감고 정말로 인간과 인간의 우정이, 마음의 연결이 되는지, 우리들은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봅니다.


1945년의 패전 당시에 조선에는 70만 명의 일본인이 있었다. 이 일본인은 거의 다 부산항에서 귀국했지만 이때 “우리들을 괴롭힌 자, 우리나라를 빼앗은 미운 녀석들이라고 한국 사람들은 일본 사람들을 상처를 입힐 수도 죽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본도 또한 패전하여 悲哀(비애) 속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36년 동안 지배해왔던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떠나갈 때 “36년 동안 죄송합니다.”, “독립국가가 된 것을 축합니다.”라고 말한 일본사람은 몇 명이 있었을까요? 한 사람도 없었지 않았는가? 하는 한국의 어느 한 평론가의 말에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대답할 말도 못 찾았다.


老子(노자)는 말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 많으면 비통하게 그 점을 울고, 싸움에서 이기면 喪禮(상례)를 다하여 그것에 대처하라”


일본에는 古來(고래)부터 “武士道(무사도)라는 精神(정신)이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이와 같은 유가적인 사상과 일본사람 특유의 美精神(미정신)이 가미해진 것으로 이겼다고 교만하지 말고, 졌다고 비굴하지 말라. 자기에게는 추상과 같이 엄하게 타인에게는 따뜻한 사람을 주어 항상 청렴한 정신으로 잇는다.


그러나 이것도 청일러일 전쟁 때까지이고 그 이후부터는 사람이 군대 우두머리에 서고 이론만이 우선이고, 인간으로서 제일 소중한 “精(정)”이라는 일면이 후퇴하고 말았다.


만약 노자와 같이 된다면 “싸움에 이긴 나라는 싸움에 진 나라에 대하여 상복하는 예를 갖추어야 하는 처사야말로 옳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식민지를 지배한 나라는 피식민지로 처해 있었던 편에 서서 그 나라 사람들의 비애를 생가하고 그 나라의 역사를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은 인간으로서의 지성이 없으니까 한일문제는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전생에 졌을 때의 조선 총독은 육군대장 아베노부유끼이다. 임기는 불과 1년도 안 되고 패전을 당하여, 여운영에게 행정권을 위탁, 도망치듯이 일본에 돌아갔다. 그 직전에 법무국장으로부터 조선 사람의 총독부의 한 검사에게 “일본의 식민지 지배가 이것으로 끝나겠지만 떠날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고 물었다. 검사는 “아베 총독 각하의 뜨거운 눈물로써 조선 사람을 격려하는 성명을 내는 것이겠지요” 국장은 “그것 참 좋은 생각입니다. 총독에게 그렇게 전하겠습니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지배한 최고 책임자로서의 총독으로부터 36년 동안의 사죄도 반성도 광복의 찬사도 격려도 아무 것도 없이 끝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같은 주도를 산산이 당하여 패전한 독일, 이 나라의 히틀러 나치는 6백만 명의 유태인들을 죽였다고 합니다.
“용서하라, 그러나 잊지 말라”라고 쓰여 진 비석이 폴란드 바르샤바의 게지도에 서있다고 한다. 이곳에 독일 수상, 브란트가 화환을 들고 방문했을 때 갑자기 쓰러지는 듯이 무릎을 땅에 꿇고 어깨를 들먹이어 같이 서있던 사람들도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브란트는 10대 정도부터 반 나치로 있었기에 계속 도망 생활을 한 인물이다. 그래서 나치가 행한 유태인 학살에 관해서는 부란트에게는 죄가 없다. 그렇지만 브란트는 히틀러 나치와 같은 독일 사람이다. 브란트가 흘린 눈물은 같은 독일인으로서 나치의 폭살을 막을 수 없었던 후회의 눈물이었던가, 장래 같은 독일인의 피를 나눈 자로서 전 독일인을 대표하여 사죄하는 마음이 그렇게 하게 했던 것일까요?


지금 서울역에서 자동차로 10분 달려오면 인사동에 닿고, 그곳에는 書(서) 道具(도구)를 취급하며 한국의 고전예술, 미술 냄새로 활기를 띄고 있다. 그 끝에 탑골공원이 있다. 옛날에는 파고다공원이라고 해서 이곳이 3.1독립만세운동의 발상지인 것이다.


이곳에는 매일같이 수많은 노인들이 하루의 여가를 즐기고 있는 광장으로 보이지만 한 번 빙 둘러보면 일본인으로서의 찹찹한 생각이 든다. 콘크리트 벽에 일본인의 탄압에 저항하여 버티고 있는 한국사람 남녀노소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 벽화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일본의 역대 총리인 나카소네, 호소가와, 하시모토 수상이 한국에 와서 36년 동안의 피 지배국가의 비애와 부자유 그리고 탄압은 유감이었다」라던가 “애통한 마음 금치 못하겠다”라던가 하는 미언 어구를 늘어놓고 사죄한 말을 했다는 생각으로 있겠지만, 그러한 말보다는 파고다 공원에 와서 헌화를 하던가, 일본인답게 향을 올리던가 해서 한 방울의 눈물이라도 좋으니 눈물을 흘리면 좋지 않을까요?


万(만) 마디의 말보다 한 방울의 눈물이 더 설득력 있다. 그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백제국 충청남도 부여가 전해준 것이니까. 그 불교에 참이라는 사상이 있다. 慙(참)라는 것은 권력을 다하고 다한다 해도 모자라는 것을 수치로써 여기고 향상되도록 마음을 갖도록 하자는 뜻이다.


분명히 일제 36년의 지배는 일본 측에서 보면 나쁜 것만은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국인이 좋아서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


한일 합병은 합법적이었다고 하는 이론은 일본 측에서는 얼마라도 할 수 있다. 또 일부의 조선 권력자 중에는 그러한 사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1910년(명치 43년) 8월 22일 일본이 한반도를 합병할 때 삼천리 2천만 명의 사람들이 나라를 잃은 망국의 슬픔에 조국의 대지를 치면서 통곡한 사실을 일본인은 잊어서는 안 된다.


“慙(참)이라는 불교 사상을 다시 한 번 더 돌이켜 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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