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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평화탑 건립 경과보고(태양회뉴스 19호)

관리자 2018-02-27 (화) 08:02 6년전 4934  

대만 평화탑 건립 경과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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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탑 제막식 테이프 커팅​

 대만에 신죽시(新竹市)라는 공업도시가 있다. 이 도시에 지중해공원이라는 아름다운 공원이 있는데 2014년 2월 28일 이 공원에 높이 7m되는 평화탑이 건립되어 제막식과 동시에 평화의 불이 점화되었다. 이 탑의 건립에 한국태양회 회원 562명이 기부하였고 당일 기념식에는 42명이 참가했다. 대만으로 보면 제1호의 평화탑으로 역사에 남을 것으로 생각된다.


평화탑 건립 전모에 대한 경과보고는 다음과 같다.

시작은 약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5년 2월 28일 오전 대만 총통 이등휘(李登輝)와 정부요인이 참석한 가운데 타이베이 2.28 순난자 추도식이 열렸다. 같은 날 2시28분부터 2.28 유족협회 주최로 「2.28순난자 추도 법회」가 같은 공원의 음악당에서 3천명이 모여 법요식을 봉수했다.


그때 도사(導師)를 맡은 승려는 일련정종 일본의 군마현 혼노우사(本應寺) 31대 주지인 다카하시 고준(高橋公純)이었고, 급사 역할은 다카하시 료켄(高橋良建)이었다.  그날 이후부터 다카하시 고준 주직은 매년 「2.28 평화공원」에서 10년 동안 계속 추도식을 거행하여 왔다. 당시의 「2.28 유족협회」의 이사장은 로진평 씨의 아들인 로덕웅 씨이다. 로덕웅 씨는 그 전년도에 혼노우사에 와서 수계를 받아 이미 혼노우사의 신도이었다. 대만 2.28 추도식을 일련정종에서 그리고 혼노우사 주지가 할 수 있었든 것은 이런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로진평 씨는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사람으로 1947년에 죽임을 당한 것은 분명하지만 언제 어디서 죽임을 당했는지는 모른다고 한다. 또 국민당의 탄압이 극심했기 때문에 40년 동안 한 번도 정식으로 아버지의 ceh를 위한 불사(佛事)나 법요, 분향을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 사람이 수만명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40년 동안 한 번도 추선 독경, 향을 올리지도 못했다니!!!」이런 비통한 일이 디만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나는 지금까지 몰랐다. 나 같은 사람은 부탁을 받으면 가겠지만 일련정종 종문에는 해외부가 있고 또 대만에 승려가 파견되어 있어 종문에는 높은 승려가 많이 있으므로 나보다도 그런 사람에게 부탁하는 것이 더 좋겠다고 조언을 했다. 그러나 나에게 온 로덕웅 씨 외 몇명 대만 일련정종 신자는 해외부나 다른 승려에 대해 분노와 불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로덕웅 씨가 대만에 있는 일련정종의 포교소에 “2월 28일 타이베이 공원에서 추도식을 하고 싶습니다. 꼭 존사님께서 도사로 참석하셔서 주도해 주십시오”라고 정중하게 부탁을 드렸지만 대만 일련정종 포교소는 “우리 일련정종은 사회복지를 위한 단체는 아닙니다. 그래서 그런 일은 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로 거절했다고 한다. ‘일련정종만이 죽은 사람을 성불 시킨다’고 하면서 2.28 순난자는 성불시키지 못하는가? 저 사람들은 2.28 유족들의 슬픔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다. 저런 사람들에게 무엇을 부탁하겠는가? 하고 모두가 흥분하여 화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에게 마지막으로 와서, “다카하시 존사님! 존사님에게 마지막으로 부탁을 드립니다. 다카하시 존사님께서 대만에 오셔서 2,28 순난자 추도식을 해주시지 않으면 우리들 대만 일련정종 신자는 자폭하여 이 신심을 그만 두겠습니다.”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데 나는 고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련정종 종문은 어른 승려가 되기 전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설사 보조교사를 10년 하고 교사가 된다 해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사원의 주지가 되면 그나마 겨우 조금은 할 수 있다.


우리 종문의 종제 종구에는 사회에 공헌한 승려에게 상을 주게 되어 있으니까 해도 되겠지만 잘 안 되고 있는 실정이다. 사회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어떻게 광선유포를 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이 줄곧 나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 가운데 대만의 2.28 순난자 추도식이 그런 나의 인생을 크게 변화 시켰다.


여기서 대만의 2.28 사건에 대하여 조금 말씀 드리겠다.
일본이 대만을 통치한 지 50년, 일본의 패전으로 일본은 대만을 떠나고 중국에서 국민당이 새로운 지배자로 왔다. 1947년 2월 28일, 담배 파는 잡상인을 단속하던 중 나이 많은 여자 상인을 때려 부상을 입히고 길가든 학생이 총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당시 대만의 책임자는 중국 본토에 있는 장개석에게 급전을 보내 군대를 파견 시켰고, 이 군이들에 의해 대만 사람들이 무차별로 학살을 당한 사건이다. 그 이듬해 계엄령이 발동되고 이 계엄령은 38년 동안 계속 되었다. 38년 동안 14만 명이 아무런 죄도 없이 붙들려 갔고 약 4천명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2.28 사건을 포함하여 한마디 항의도 할 수 없었든 시기이기도 했다. 1975년 장개석이 서거하고 1986년 대만출신 사람들에 의해 민진당이 결성되었으며, 1987년에 계엄령이 해제되었다. 계엄령이 해제되어도 대만은 아직도 불안정한 시대에 놓여 있었다.


1988년 장경국(장개석의 아들) 총통이 서거하고 이등휘가 총통에 취임 3년 후인 1990년 2월 28일에 비로소 2.28 사건으로 순사한 사람들의 추도식을 처음으로 올리게 되었다. 약 43년 동안 국가로부터 죽임을 당한 자신들의 아버지, 남편, 형제들의 추도식을 할 수 없었던 그 괴로움, 비통함을 종문승려는 이해하지 못한 탓으로 ‘우리는 사회복지를 위하여 여기 온 것이 아니다’라는 말로 거절한 것이다.


나는 ‘할 수 없다. 내가 가야겠다. 주지 직을 반납해서라도 가야겠다. 대만의 일련정종의 신용회복을 위해서라도 가야겠다.’라는 마음으로 1994년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계속 대만에 가고 있는 중이다.

평화학에 눈을 뜨다.

어느 날 승려로부터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을 현대로 해석하여 논하라」라는 제목으로 15장 정도의 논문을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입정안국론이란 니치렌 대성인님이 39세 때 당시의 일본의 최고 권력자인 호조 도키요리에게 헌상한 일국치술(一國治術)의 서이다. 「입정안국론은 다시 말하면 올바른 법을 세워 일국을 안정시킨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국의 평화수립을 하는 것이다.


그 당시 평화에 관한 책은 본 적도 없고 있다 해도 돈이 없어서 살 수 없었을 것이다. 단 평화라는 학문, 평화라는 사상이 대단히 내 마음속에 깊이 새겨진 것은 사실이다.


그 후 출가하여 대학교 2학년 때 일본신문협회에서 「평화론」에 관한 논문을 모집하였는데 우수자는 백만 엔의 상금이 있었다.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최고의 평화론은 내가 믿고 있는 니치렌 대성인님의 입정안국론인데 이것을 어떻게 사회에 응용하는가 하는 과제이다. 한 달이나 걸려 논문을 제출했다. 결과는 백만 엔이 아니라 가작으로 겨우 볼펜 한 자루로 끝났다.


그렇지만 이때 인류사회에서 제일 소중한 학문은 평화학인데 아무리 큰 서점에 가서 찾아봐도 평화학에 관한 책이 없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도쿄 칸다에 밀집해 있는 헌책방에서 불교서적을 사면서 한 집 한 집 차례로 들어가 평화에 관련된 책을 찾아 1년에 겨우 1권정도 살 수 있었다. 평화학에 관한 여러 책을 통해 평화학이란 깊고 폭넓게 이것이 절대적이다 라고 결론짓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조금이나마 평화에 대한 감사함을 느낀 것은 일본은 근년의 전쟁에서 너무 처참하게 패배했기 때문에 전쟁은 또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하며 평화에 대한 존귀함, 고마움에 눈을 뜬 사람이 많이 생겼고, 각국과 비교하면 평화에 대한 모임, 관련기관 등이 많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금후 하나의 사회나 하나의 국가만으로는 평화를 유지할 수는 없다. 여러 방면의 학문, 문화기관, 기구, 사람들의 이해와 협력 없이는 평화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므로 세계는 그런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한국 평화탑 건립

2006년 한국 합천에 있는 원폭복지관 내에 「평화의 화탑」을 건립하여 제막하고 평화의 불을 점화했다.
일본에서 복지단체 태양회를 만들어 나름대로의 복지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한국의 히로시마라고 불리는 합천을 방문하여보니 한국의 피폭자의 생활상이나 지원이 너무나도 일본과 격차가 심하다는 것을 알고 봉사활동의 중심을 한국의 피폭자분을 위해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당시 한국의 피폭자는 국가의 지원이나 생활보장이나 원조가 전혀 없고  협회를 원조해주는 단체도 없었다. 그 당시 태양회는 그다지 힘도 없었지만 매년 1년에 두 번은 꼭 직접 합천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여 다소나마 신뢰를 얻고 있었다.

그래서 2000년부터 ‘평화탑을 만들자’라는 제안을 하여 원폭협회 회장도 찬성했지만 건립할 토지가 없었다. 3년, 5년 시간만 점점 흘러가는 동안 어느 피폭자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다카하시 씨 평화탑도 좋지만 피폭자들은 빈곤하기 때문에 그 돈으로 식료품을 지원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만....”


그 심정은 잘 알겠지만 그때는 이미 일본에서는 한국원폭피해자에게 보상금을 주기로 결정이 되어 있었고 원폭피해자 복지관 건립지도 합천으로 거의 정해져 있을 때였다. 8월 15일이 되면 패전의 비참함을 알게 된 일본은「평화를 위한 모임」, 「평화를 위한 콘서트」 등이 열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세계를 향하여 「핵이 없는 평화선언」이 제창된다.


한국에서는 대대적인 평화의 모임이 거의 없는 것 같아서 역시 한국에 「평화의 탑」 하나 정도는 필요할 것 같아 건립하기로 결심하였고, 오랜 기간 준비하여 드디어 2006년 8월 6일에 합천에 평화탑을 건립하여 제막식을 올렸다. 이날 제막식에는 정부와 사회 저명인사도 많이 참석하였고 한국 사람들 가슴속에도 평화의 정신이 많이 깃들어 있는 것을 보고 안심이 되어 가슴을 쓸어내린 추억이 있다.

대만 평화탑 건립의 시작
 

대만에 평화탑을 건립하자는 제안은 실은 한국에 평화탑을 건립하기 전부터 있었다.
그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2005년 2월 태양회 다카하시 이사장을 통하여 일본의 하마유(평화의 꽃)를 지키는 그룹의 사무국장인 니시무라 이치로우(西村一郞)씨가 2.28 유족협회 이사장인 로덕웅 씨에게 평화의 꽃 하마유(대만 이름으로는 「문주란(文珠蘭)」)을 증정했다. 다음 날 2.28 유족협회가 주최한 「2.28 순난자 추도회」에 그 당시 마영구(馬英九) 타이베이 시장이 참석하였는데 그 시장에게 로덕웅 2.28유족협회 이사장이 그 문주란을 증정한 것이다.


다음 날 마 시장은 2.28 기념관 앞의 오른쪽 입구에 문주란을 심었다.
평화의 꽃 다음은 「평화의 불」이라고 로덕웅 씨와 2,28 기념관 역원들에게 말씀 드렸더니 3명이 기념관 앞에 나와 왼쪽 입구에 「평화의 불」을 건립하자고 그 장소에 사각 선까지 그어 두었다.
그리하여 설계도안 등을 두 번 대만에 보냈지만 답이 없었다.


「평화」라는 것은 불행을 많이 경험한 사람이 제일 많이 주장하게 되고 또 설득력이 있다. 그렇다면 대만에서는 2.28 관계자가 제일 걸 맞는 사명과 자격이 있고, 장소는 2월 28일에 「대만사람들이여! 대륙에서 건너온 자의 횡포를 용서하지 마라. 대만사람들이여! 일어섭시다.」라고 전국에 호소했던 당시의 대만방송국(현 2.28 기념관)의 앞이 건립지로 최적인 장소이다.


2.28 순난자 추도회를 2.28 공원에서 10년 동안 해 온 사람으로서 이 기념관 앞에 평화탑이 건립된다면 얼마나 멋질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이유는 일본의 일련정종이라는 종교가 대만에서 「종교법인」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대만이라는 국가 사회로부터 종교법인을 인정받은 이상 이 종교가 어떤 형태로든 대만 국가 사회에 공헌하지 않으면 안 된다. 법인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들이 가진 종교로 무엇을 하면 제일 좋을 것인가? 그것은 이 종교가 가진 「평화」의 사상을 어떻게 대만 사회에 반영시킬 것인가? 그 중 하나로 「평화탑」을 건립하는 것이라고 항상 내 가슴속에 숙제로 남아 있었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르고 2012년에 드디어 일련정종 대만연엽회 총회에서「법인으로 정식적인 번호가 나왔다」고하여 「평화의 불을 점화하는 화평탑 건립의 기금을 개시한다.」라는 보고를 받았다.
그렇다면 언제 어디에 건립할까? 구체적인 제 1보가 시작되었다.

평화의 불과 평화의 꽃

 

이 두 가지는 일본의 원폭투하와 관계된다. 먼저 평화의 불에 관해서는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어 실로 일순간에 히로시마가 사라지고 말았다,


야마모토 씨는 폐허가 된 히로시마의 친척이 걱정되어 찾아가보니 건물은 폭풍에 날아가고 친척은 폭사 당하였는데 지하에서 불이 타고 있어 마침 가지고 있던 카이로(불을 담는 작은 용기)에 점화하여 후쿠오카현의 집으로 가지고 왔다.


미국에 대한 원한을 잊지 않기 위해 그 불을 집안 곳곳에 켜두고 20년이 지나는 동안 어느새 원한의 불이 전쟁은 두 번 다시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평화의 불」로 변하여 남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불은 야마모토 씨가 살고 있는 「호시노무라(星野村)」에서 관리하게 되었지만 이 이야기에 감동을 받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하여 일본 전국 20여 개소에 분화(分火)되어 평화의 불로 타고 있다.
결국 평화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상징적으로 평화탑은 중요하고 평화의 불도 중요하지만 그 이상 중요한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평화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오키나와에 있는 법화경사에 가서 분화되어 있는 불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불에 의하여 한국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평화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여기에 있는 평화의 불은 살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2006년 8월 6일에 합천에 평화탑을 건립하여 제막하였고 「평화의 마음이야말로 소중하다」라는 팜플렛을 만들어 참석자 전원에게 배부하였다.

평화의 꽃에 관해서도 역시 히로시마의 원폭과 관계가 있다. 히로시마에서 2km정도 떨어진 지점에 하지산(比治山)이 있는데 그곳에 오지마라는 군인이 근무하고 있었다. 식사담당자인 오지마 씨는 식재료를 사기 위하여 마을로 내려왔을 때 어느 집에서 하마유(일명 문주란)를 보고 조금 얻어 군부대 앞뜰에 심었다.


8월 6일 오지마 씨는 원폭의 후폭풍에 의하여 날아가 기절을 했지만 목숨은 건졌고 가마쿠라의 집으로 돌아가서 몸을 회복하고 3개월이 지날 무렵 히지산을 방문했다. 산천초목이 모두 말라 없어진 곳에 하마유 꽃이 홀로 살아 있지 않은가?
“어쩌면 이렇게도 생명력이 강한 꽃일까?”


그 꽃을 가마쿠라의 집에 가지고 와서 피폭당한 사람과 생활고에 시달리는 사람,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하마유를 가지고 가서 열심히 반전과 평화를 말하고 있던 중 어느새 「평화의 꽃」으로 변하여 지금은 세계 21개소에 심어져 있다.


이 꽃을 일본 피폭 하마유 클럽의 사무국장 니시무라 이치로우 씨에게 부탁하여 지금은 한국에 17개소, 대만에 7개소에 심었다. 이번 대만에 건립한 화평탑에도 니시무라 씨는 많은 도움을 주었다.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하고 3일 후 나가사키에도 원폭이 투하되었는데 이 나가사키에도 「평화의 불」이 있다. 나가사키의 불은 폭풍으로 날아간 기와에서 채화했다고 한다. 대만에서 평화탑 건립이 결정되고 니시무라 씨에게 받은 원폭의 기와를 유리상자에 넣어 행사 당일 니시무라 씨가 신죽시에 기증하는 것으로 정했다.그렇게 행사 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건설의 여명(黎明)

 

2012년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을 무렵 대만의 부주지로부터 한통의 메일이 왔다. 종교법인의 번호가 정식으로 나와 이제 연엽회에서 기금 모금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어 내년부터 평화의 불 모금을 개시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내 계산으로는 연엽회가 할 마음만 있으면 충분히 된다고 생각했다. 석탑 대금은 내가 부담하고 나머지 당일 행사비, 기념품, 식사 대금은 신자들의 모금으로 충당할 수 있을 것 같다.


대만 석재상과 내가 한국에 건립한 60cm 사각형의 높이 250cm 되는 석재는 자금이 얼마나 필요한지 알아보았는데 토지대금을 포함하여 10만 겐(약 400만원)이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신죽시에서 장소를 제공받았다는 말을 듣는 즉시 10만 겐을 석재 값으로 내어 놓았다.

2013년이 되었다. 올해의 2.28 순난자 추도법요는 타이베이 묘수사에서 봉수 했다. 나는 이 날 대만 연엽회 회원들에게 평화탑에 대하여 설명했다. “작년 연엽회 총회에서 평화탑을 건립 할 결의 발표가 있었다지요. 내가 대만에 온 것은 1994년입니다. 그때 2.28 공원 안의 2.28 순난자의 기념탑을 처음 보았습니다. 일련정종의 승려는 돌아가신 분의 영령을 위로하고 사후 세계의 안심, 성불을 말하는 사람으로서 2.28 순난자에게 맞는 위령탑은 지수화풍공(地水火風空),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나타내는 5륜의 탑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탑을 2.28 사건의 추모자들이 기륭(基隆)의 항구가 보이는 작은 언덕에 세우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그곳에 세우지 못하면 우리들의 힘으로 사원을 만들어 사원 뜰에 부처님의 뜻에 맞는 2.28순난자 위령탑과 대만의 항구적인 평화를 기원하는 「평화탑」을 건립하여 평화의 불을 점화하고 싶은 생각입니다.”
여명(黎明)의 「여(黎)」란 「흑(黑」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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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탑 건립 관계 대표분들​


그러니까 여명이란 아직 밖은 어두움이 가시지 않았지만 금방 어두움이 사라지려고 하는 시간대를 말한다.
이 시간이 지나면 바로 시뻘건 태양이 동천에 떠오르니까 어떤 일이든 간에 또 어느 집단이든 간에 앞으로 더 번창해 나간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실제의 대만은 「평화탑」건립의 여명이 온 것이다.

길보와 비보

 스리랑카의 가난한 초등학교까지 가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니시무라(西村)씨가 3년 전에 인쇄소를 경영하고 있는 다카이(高井) 씨를 소개해 주었을 때, 대만에 평화의 탑을 건립하여 평화의 불을 점화시키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훌륭한 일이군요. 대만에 평화탑이 건립되면 우리들이 평화의 불을 가지고 가겠습니다. 평화의 불은 여기에 있는데 보시겠습니까?”
“네. 꼭 보여 주십시오‘
사무실 한켠의 두 개의 관에서 불이 발갛게 타고 있었다.


“우리들은 언제라도 가지고 가겠습니다. 만약 대만에서 건립하면 우리들은 갈 수 있습니다. 대만은 4박 5일 정도의 일정으로 가겠습니다.” 그 이후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났다.


3년째에 접어든 12월 말에 일련정종 대만연엽회 총회에서 평화의 불 점등이 의결되어 익년 2월 28일에‘올해야말로 꼭 해내자’는 결정이 된 것이다. 그 후 신죽시에 살고 있는 연엽회 이사인 왕예화(王藝樺) 씨가 신죽시 의회 의원을 통하여 시청에 평화탑 건립을 건의 했다.


시장에게 한국의 평화탑 건립행사 모습을 담은「태양뉴스」를 자료로 드리면서
“이런 탑을 세우고 싶습니다. 땅을 조금 제공해 주십시오.”
“확실한 계획서를 제출해 주세요. 장소는 어디가 좋겠습니까?”
시장이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져 빨리 될 것 같다고 한다.


자료를 보고 신죽시의 시의회를 거쳐 결정한다는 말을 듣고 여기서 통과되면 공식적으로 대만 정부의 허가를 받는 것이므로 설사 정치권력이 바뀌어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5월 11일에 대만에 갔을 때 대만 3개 사원에 평화탑 건립에 관한 뜻을 기록한「평화탑 모금함」이 이니 투명한 상자로 만들어져 있었다.


신죽시에 살고 있는 왕이사가 시장과 만나 재삼 상의한 결과 시청의 인가를 받으려면 8곳의 도장이 필요한데 지금 6개까지 받았다는 보고와 탑 설계도, 석재상 주소와 이름을 정부에 제출하여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늦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7월에 신죽시의 지중해 공원 안에 건립될 예정으로 사진을 5장 보내왔다. 설계도가 3장 중 하나를 신죽시장이 선택하는데 높이 7m 폭 7m 규모와 높이 8m 폭 30m규모의 설계도 중 선택한다고 한다.
이제 여기까지 진행되고 있어 평화탑 건립은 틀림없이 건립될 가능성이 매우 커 보였다.


평화의 불을 구하기 위해 일본에 갔다. 그런데 복잡한 서류가 필요하고 더구나 2월까지는 시간적인 여유가 없을 뿐만 아니라 불을 운반하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다는 문제에 봉착했다.


니시무라 씨와 상의한 결과 원폭의 폭풍으로 날려간 기와에서 채취한 불과 기와를 니시무라 씨가 소장하고 있는데 이 불과 기와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이 기와는 원폭을 직접 당해 방사능 세슘이 포함되어 있는 기와이다.

7월에 접어들어 평화탑 건립 장소에 대한 사진 5장과 도면을 보내왔다. 비용도 예상보다 5배~7배는 더 들것 같다.


나는 대만에 「대만 평화탑 건립위원회」를 만들어 기획과 운영을 하면서 기부금은 1겐이라도 명확하게 하기 위해 위원회 명의의 도장을 찍은 기부금 영수증을 발행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리하여 9월18일 제1회 위원회가 열렸고, 이때 난 약간의 기부금을 준비해 갔다. 나의 가족과 한국 태양회의 기부금이다.

평화라는 것은 한 사람 두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은 아니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의 힘이 결집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6개 사원과 1개 정사의 신자 전원이 참가하는 것으로 하고, 또 주지와 부주지를 합치면 2006년에 한국에 건립한 평화탑의 대금보다 훨씬 더 많다.


이 기부금이 제1차 기금이었다. 약 300명의 이름과 금액이 기록된 기부금 명단을 제출했는데 이 명단과 기부금액을 본 건립 당사자인 대만 연엽회 사람들이 분발하도록 힘을 불어 넣은 계기가 된 것은 사실이다.

2013년 9월 23일 오후 4시에 제1회의 「평화탑건립위원회」가 대만 신죽시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회의는 참석자 전원이 오래토록 기억에 의미 있는 회의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사회자인 로건성 씨가
“이번 평화탑은 대만 제1호 평화탑이 되는 것입니다.”
“시장을 필두로 많은 정부 관계자가 오시도록 합시다.”
“500명 이상 참가”


이 식전을 성대하고 성공적으로 하려면 우수한 기획력, 풍부한 재원과 능력 있는 사람을 모으고 그 능력을 어느 정도 표출할 수 있을지, 그리고 사람을 어떻게 움직이게 하는가에 달려있다. 그날 회의가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회의가 끝나고 건립 장소에 가 보았다. 가보니 장소는 꽤 넓은 곳이다. 아직 탑의 크기도 결정되지 않은 상태이다.


탑의 규모는 3개의 안건이 나왔다.
①높이 3.5m, 폭 7m  ②높이 7m, 폭 8m ③높이 30m, 폭 30m이다.
폭 30m 전후라면 200평이 필요하다. 이것은 규모가 커서 좋지만 재원이 상당이 소요될 것 같다. 역시 높이 7m, 폭 8m 정도가 이상적이다.


단, 바다가 150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고 해풍이 강하고 추위도 매섭다. 여기에 평화의 불을 점화시키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틀림없는 사실은 여기에 대만 제1호 평화탑이 건립된다는 점이다. 그와 같이 대만 제1호 평화탑 제막식에서 평화의 불을 점화할 때 관계자는 긴 불을 잡고 자신들이 대만 평화에 참가했다는 기쁨을 마음속에 남겨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할까? 고심했다. 대만에서 돌아온 후 매일같이 대만 평화탑만 생각하게 되었다.

먼저 평화론을 써야겠다. 대만의 근대사를 보면 외세의 침략으로 대만 사람들은 자신의 안위를 지키는데 몰두하여 「평화」를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평화의 탑을 건립하는 주최자인 일련정종 연엽회 관계자에게 “당신들이 생각하는 평화란 어떤 것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모르겠습니다.”라는 대답을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최소한이라도 평화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만 한다. 그래서 평화에 관한 것을 연엽회 간부용으로 원고 17장과 조금 더 상세하게 소론을 기술한 원고 70장을 썼다. 다음으로 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전쟁, 원폭, 핵의 사용 등이 있으니까 그런 종류의 포스터를 행사장에 붙이고 싶었다.


대만에서는 2.28 사건, 한국에서는 6.25 동안, 일본에서는 원폭의 참상에 관한 포스터를 수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먼저 니시무라 씨가 원폭 포스터를 20장 정도 보내왔다.
한국태양회에서는 오키나와 전쟁 기념관, 나가사키 원폭기념관, 히로시마 원폭기념관에 원폭의 참상에 관한 포스터를 요청하자 재빨리 히로시마 원폭기념관에서 답장이 왔다. 히로시마에서 포스터 50장과 DVD 「원폭의 어머니의 부르짖음」을 빌렸다.

다음은 「평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종이학」이 있다. 이것ㅇㄴ 사다코라는 초등학교 6학년 여학생이 피폭 후유증으로 인한 병으로 인해 중학생이 되어도 한 번도 학교에 가지를 못했는데 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종이학 천 마리를 접으면서 삶에 대한 희망을 이어갔다.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1,914마리를 접고 죽었다고 한다.


살고 싶다는 애절한 소망이 깃 들인 종이학 2천마리를 미처 다 완성하지 못한 채 도중에 죽고만 사실이 전국에 알려지자 많은 학생들이 감동을 받아 히로시마의 사사키 집에 종이학을 보내기 시작 하였다.
지금은 히로시마의 원폭기념관 앞에 종이학을 두 손에 높이 든 소녀상이 세워져 있다.

태양회 서울지부가 천 마리, 부산지부가 5백마리, 경남지부가 414마리 합계 1,914마리의 종이학을 만들기로 했는데 경남지부가 아주 많이 접어 3개 지부 종이학을 모으니 모두 3천 마리를 만들었고 그것을 모두 대만에 보냈다. 이 종이학은 일본이 발상지이고 만들기는 한국 사람이 했으니 일본 화복을 입은 사람과 한국 한복을 입은 여성이 행사 당일 대만의 초등학생 남녀 두 명에게 걸어 주기로 하였다.


그리고 남은 종이학은 50마리씩 한 줄로 엮어 120cm 되는 줄을 130cm 막대기 3개를 10m 간격으로 줄로 이어서 두고 그곳에 3천 마리의 종이학을 메달아 놓는다. 행사전이라 우선 천으로 덮어 두기로 했다.
그 외 니시무라 씨가 원폭의 기와를 시장에게 증정한다. 이 기와는 어디서 생겼고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것을 명확히 설명해야만 한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기와로 볼 수도 있으니까. 또 69년 전의 원폭기와로 귀중한 것이니까 유리 상자에 넣기로 했다.


또 식전 중간에 니시무라 씨가 신죽시에 「평화의 꽃」을 증정한다. 왜 문주란(일본명 하마유)을 평화의 꽃이라고 하는가? 꽃이던 기와이던 종이학이던 모두 설명하지 않으면 식전에서 기증해도 의미가 희미해질 우려가 있다. 그래서 참가자 전원에게 팜플렛을 제작하여 나눠 주기로 하였다. 이 팜플렛은 대만, 한국, 일본사람이 참가하니까 3개 국어로 준비해야 한다.


11월 19일에 예정되어 있는 평화탑 건립위원회가 사실상 마지막으로 모든 준비를 완료하기로 했다.
한국에서는 서울과 부산 2개 지부가 각각 일정에 따라 40여명이 참가하게 되었고 한국의 두 번째 기금, 일본의 기금, 참가자도 정해졌다.

일본, 한국 참가자의 송영체제, 기차 시간표, 인쇄와 배부, 한국 태양회 부인부 합창단에게 「원폭의 어머니에게 바치는 노래」와 평화의 꽃인 하마유를 노래한 「바다여 가르쳐 주세요(다카하시 고준 작사, 신대철 작곡)」를 선정했다. 그리고 지휘는 이준용 씨가 맡기로 했다. 또 일본, 한국 대표 인사 등을 미리 번역해 두어야 했다.


대만에는 평화탑 건립은 처음이고 한국은 이미 경험이 있으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반드시 한국에 상담이 온다.
매일 팩스 자료 등이 15cm 정도의 두께가 되었다.


기념품은 「존앙평화(尊仰平和)」, 기념비에 쓰인 평화화(平和火), 또 기념비 속의 문장도 태양회 다카하시 이사장이 장, 단의 문장을 써서 보냈다. 그리고 제일 소중한 「평화의 사상」을 대만 사람, 또 참가자 그 외 많은 분들의 마음속에 깃들게 하는 것이 진실한 평화의 기초가 된다고 생각되어 이것을 다카하시 이사장이 처음에는 400자 원고지 70장정도 썼지만 아무래도 부족한 것 같았다. 그리고 대만 연엽회는 이것을 출판한다고 하여 150장정도 분량을 더해 끝냈다.


준비는 성공의 80%라고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1년 이상의 준비가 있었고, 드디어 2014년 2월 28일 대망의 날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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