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 11호)한국여성 최초 민간비행사 박경원에 대하여 > 해모음뉴스

본문 바로가기

회원메뉴

쇼핑몰 배너

(무궁화 11호)한국여성 최초 민간비행사 박경원에 대하여

관리자 2019-10-11 (금) 19:05 4년전 4314  

 

 지난 3월, 일본중앙대학생 이유빈 양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 저는 박경원에 대해 논문을 준비 중인데 박경원에 대하여 가르쳐 주십시오”
 중앙대학생이라면 여러 가지로 자료도 많이 수집할 수 있는데 어떤 경로로 나를 소개받았는지 모르지만 나에게 박경원에 대하여 알려달라는 연락이 일본에서 종종 온다.  
 15일, 장소는 이케부쿠로의 워커즈코프의 소회의실에서 중앙대학생 4명이 와서 정면 측면 2대의 카메라로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이)박경원의 인간성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고)굉장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요. 일본 여성으로서 우주비행사로 된 무카이 치아키 씨가 있지만, 현대는 무카이 씨, 당시의 시대 배경을 생각하면 무카이 씨보다 위일지도 모릅니다.
(이)왜 그런 평가를 합니까?

3791203f97efd194279feea42f973275_1570788263_6865.png
<중앙대학생 이유빈 양 (전시관에서)>

(고)생각해 보세요. 미국에서 처음 비행에 성공한 것은 1903년입니다. 일본에서는 1910년 10월로서 육군대 히노와 도쿠가와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비행에 성공했다고 합니다. 마침 박경원이 일본에 가는 1917년에 부산에서 미국 여성의 공중비행을 보고 자기도 비행기를 타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 것이 출발점입니다. 일본 첫 비행에서 7년으로 일본은 육군이 주로 비행기를 개발하게 되지만, 100m 날아가서 불시착하고 나무에 부딪쳐 뼈가 골절상을 입는 등 많은 사고가 계속 일어나서 비행기는 위험한 시대에, 조선인 여성이 비행기를 타고 싶다는 용기는 어디에서 나오는지 신기했습니다. 박경원은 보통 여성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요. 당시의 조선 여성의 입장을 생각해 보면 박경원은 뛰어나게 근대적인 개척정신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박경원의 매력은 어디에 있습니까?
(고)조선시대 500년은 여성의 지위도 학문도 매우 낮았지요. 1920년대, 일본은 대정 9년이지요. 일본인도 비행기를 본 적이 거의 없고 자동차는 부호가 가지고 있을 정도, 여성이 자전거도 타지 않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비행기를 말입니다. 그것도 자기가 조종하고 싶다는 발상과 용기, 열정, 선견지명, 무어라 형용할 수 없군요. 1920년 대에 조선인 여성이 비행기를 탄다고 하면 ‘여자가 무슨 비행기냐. 너 정신이 있냐? 안돼!!’라고 거절당했겠지요. 일본에서도 육군이 그것도 극히 몇 사람만 탈 수 있는 시대에 박경원이 비행기를 조종하고 싶어 하는 심정 이해가 됩니까?
그것도 비행기의 3등 비행사가 되기 위해서 항공학이라는 학술적인 시험과 기술적으로 1회에 2~3분, 20시간 비행을 해야 합니다. 그전에 단독비행도 있습니다. 혼자서 조종대를 잡고 500m 정도까지 상승하다 내려옵니다. 비용도 아주 많이 듭니다.
박경원은 단독비행으로 처음 혼자서 하늘을 날고 내려왔을 때, 보통 사람은 긴장하여 손에 땀이 나는데, 지도 교관이 박경원의 손바닥을 보니 땀이 나지 않은 것을 보고 교관은 『좋아!!』라고 하며 빙긋이 웃었다 합니다. 그 강심장, 정말 굉장하지요. 비행기를 타기 전에 기체의 점검、즉 정비사가 됩니다. 그리고 항공학에 합격해야 하지요. 이 모든 것을 해냈으니까 심장도 강하고 머리도 좋고, 운동신경도 좋았지요.
(이)다카하시 씨는 어디서, 무엇때문에 박경원을 연구하게 되었습니까?
(고)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나는 한국으로 이사 가기 위해 집을 팔았는데, 그 집을 산 사람이 와다(和田) 씨로 나와 사이가 좋아졌습니다. 그 사람은 시청을 정년퇴직하고 매주 일요일에 동경의 국립도서관에 가서 어떤 자료를 찾는 것이 취미였습니다.
그 사람은 학창 시절에 몸이 약해서 타가 마을의 고향집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 박경원이 그 동네에 추락사 한 것입니다. 아침에 뜰앞에 서 있으니 저쪽 산에 하얀 텐트가 쳐져 있는 듯한 물체가 아침 햇살에 빛나고 있었다 합니다. 그것이 추락한 비행기 날개였지요. 그렇게 하여 박경원을 알게 되었고, 그 후부터 박경원의 동기생 등이 박경원의 조난현장에 명일이 되면 꽃과 향을 올리는 사람이 생겨서 길 안내를 하고 분향이 끝나면 같이 차를 마시면서 박경원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그 이후부터 자기는 국립도서관에 가서 소화 초기의 신문、잡지를 열심히 조사하여 박경원에 관한 기사는 모두 복사하여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역사를 좋아해서 그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으니까 와다 씨는 나에게 그 자료를 많이 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박경원에 관하여 잘 아는 사람으로 알려진 것 같군요.
나는 한국에서 박경원의 일대기를 『한일의 유광』이라는 책에 게재해 두었는데, 그 책을 만화가에게 보이자 충분히 만화로 만들 수 있다는 말에 동경국립도서관에 직접 가서 조사하고, 대구에 가서 박경원의 고향, 호적、친족、태어난 곳、다니던 학교、유골의 행방、집 주변의 지리 등을 조사했습니다. 자료를 본 것만이 아니고 나는 현지를 조사한 것이지요. 이것이 『어디서』에 대한 답입니다.
『무엇 때문에』。이것은 만화화하기 위한 것이 초기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조사하고 있는 동안에 박경원의 위대함을 알게 되고, 그 위대함을 한국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위대한 여성、훌륭한 여성의 동상은 너무 적다는 사실을 후에 알았습니다.
3.1독립만세운동으로 옥사한 유관순 열사와 이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한국사 중의 100명』이라는 책에는 남성이 96명, 여성이 4명입니다. 한국 여성의 지위가 낮은 것이 한국의 흠이 아닐까요? 한국의 미래의 발전을 위하여 여성의 지위를 높이기 위하여 한국에서 3명 째의 여성상을 고향 대구에 건립하려고 대구시에 계획서를 제출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제가 죽기 전에 꼭 박경원의 상을 건립하여 한국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하여 도움이 되고 싶은 바램이 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 만주까지 갈 수 있는 여성 2등 비행사는 8명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성 비행사는 2등 자격을 받아도 생활비도 되지 않아 결혼 등으로 가정에 돌아가고 맙니다. 그래서 날 수 있는 여성 비행사는 박경원 외에 2명 일본 여성 비행사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 여성이 아니고 당시 조선 출신 여성이 선발되었는데, 박경원이 더 원거리 비행에 안전하다고 믿었기 때문이지요.
1930년 11월 즉 만주 비행 3년 전、영국의 여성비행사 빅터 부루스가 일본에 왔을 때 환영비행으로 날아가 하늘에서 마중한 것은 박경원이었습니다. 실은 또 다른 한 사람의 3등 비행사도 환영하러 하늘을 날았지만 바로 엔진 고장으로 불시착했습니다. 하늘을 나는 여성은 적었던 것이지요.
일본을 떠날 때 부루스가 한 말은 ‘아시아의 여성으로 분발하세요. 영국에 당신이 날아오면 내가 환영 비행하여 맞이하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미 일본 여성 비행사의 제1인자가 되어 있던 박경원은 만주 친선비행、이것이 대성공하면 다음은 유럽비행은 확실했겠지요.
일본은 박경원을 유럽, 미국으로 날아가게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박경원은 한국최초 여성비행사가 아니고 아시아 최초 여성비행사의 영예를 득했을 것입니다.

3791203f97efd194279feea42f973275_1570788195_8749.png

<박경원이 추락한 쿠로타케 산>


그날 서울에서는 10만 명이 모여 박경원이 비행기를 타고 오는 것을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박경원은 그곳에 가지도 못하고 어머니, 언니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고국비행도 하지 못하고 너무나 안타깝게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박경원은 원통하게도 30대의 젊은 나이에 하늘에서 사라졌습니다. 살아 있으면 아시아 최초 여성 비행사가 되었겠지요.
2002년에 아타미(熱海)시의 매원에 박경원의 상을 만들어 제막하였는데, 그 계기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당시의 일본의 모리(森) 수상의 회담이 아타미에서 개최되었기 때문입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아타미 시의원 등의 청원에 의해 아타미 매원(熱海梅園)을 방문하였기에 그 매원 안에 한국의 가옥을 만들고 김 전 대통령의 휘호와 박경원의 상의 제막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때 우리 태양회 회원과 박경원의 모교 관계자와 같이 구로타케 입구에 박경원의 산이라는 간판이 보이는 곳에서 한국인이 처음으로 박경원의 추도식을 올렸습니다.
그 후 한국에서는 ‘청연’이라는 이름으로 영화도 제작 되었습니다. 그때 영화사 관계자에게 제가 가지고 있던 박경원의 자료를 모두 드렸더니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구로타케의 박경원의 영혼은 원통해 하지 않을까요? 언젠가 때가 오면 올바른 박경원의 소설, 만화, 그리고 고향 땅의 아름다운 공원에 박경원의 상을 세워 한국여성의 지위 향상을 도모하고 진실된 박경원의 실상을 이 세상에 내어놓고 싶습니다.
동경의 인터뷰를 마치고 그 다음 달 17日에 이번에는 유빈 양이 마츠모토 미사키 상과 함께 나의 숙소를 찾아와서 2시간 반 정도 또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유빈 씨는 “듣지도 못한 박경원의 모습과 그 당시의 시대 배경의 어려움과 흥미진진한 사연들과 그리고 인간이 지닌 마음의 변화 등, 그저 여성 비행사의 일생만이 아니고 인간의 심정이나 혼을 듣게 되어 정말 좋았습니다. 특히 다카하시 씨가 말한 『박경원과 같은 훌륭한 여성이 있었다는 것은 국경을 초월하여 남겨야 할 역사라고 생각한다』는 말이 무엇보다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라고 한다. 인터뷰는 계속되었다.
구로타케의 입구에 2m 되는 『박 씨의 산』이라는 간판이 있는데, 아타미시와 아무런 관계도 없지만, 박경원이 불쌍하여 이 산을 다른 이름으로 「박 씨의 산」으로 정했다 합니다.
그리고 매년 정월에 그 주민들이 기념비를 청소하고 분향을 올리고 있는데 나도 한 번 참가했습니다. 그때는 30명이 아침 8시에 박 씨의 산이라고 세워둔 간판에서 집합하여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길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낫으로 나무를 치고 돌을 치워가며 천천히 올라갔습니다. 제일 어린아이는 12살, 제일 연장자는 75세로 1시간 이상 걸려 도착하였는데, 나무뿌리에 깨어진 비석을 붙여 둔 비석과 새 비석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낙엽과 떨어진 니무가지를 치우고 깨끗하게 청소를 한 뒤 향을 피우고 꽃을 올린 후 합장했습니다. 그 후 나는 오래된 비석에 새겨져 있는 글을 보니 「조인영비(鳥人霊碑)」라고 새겨져 있고, 새 비석에는 「박경원 양 조난위비」라고 새겨져 있었습니다.
더욱 작은 글자를 보고 있으니까 50대의 부인이 가까이 와서 『여기 있는 비석은 나의 할아버지가 만들어 이 산에 세웠다고 들었습니다. 좀처럼 오지 못하지만 이번이 5번째이지요. 언제 깨졌는지 모르지만 그것을 붙여주고 매년 청소도 하고, 그리고 당신같은 사람들이 열심히 새겨진 글자를 조사해 가지요. 그런 모습을 보면 아~ 우리 할아버지도 좋은 일을 하신 것 같아 자랑스러워요』 하며 울먹이며 말했습니다.
분향을 마치고 그 산에서 식사를 하고 해산했는데, 나는 지역 주민의 안내를 받아 아타미 입구에 돌아가지 않고 타가마을로 내려갔습니다. 숲속에서 밭으로 나와 10분 걸어가서 마을 사람들은 풀숲에 앉았습니다.
『이 주변이지요. 박경원을 화장한 곳은』 화장 장소를 확인하고 비행기는 마을의 초등학교에 운반되어 자기들도 그 비행기에 올라가 보았다고 하기에『날개는 무엇으로 만들었을까?』 물어보니 『나무로 만들어 그 위에 천으로 감싼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 그래서 안개가 자욱하여 날개가 눅눅해지고 기체가 무거워 900m도 되지 않은 구로타케를 넘지 못한 것이 아닐까?
역시 현장에 가보면 책에 나오지 않는 것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현장에 오게 되어 대만족이었습니다.
유빈 씨、대구에는 박경원 상 건립을 거절 당했지만, 일본의 아타미시(熱海市)에는 훌륭한 박경원의 상이 만들어져 있고, 조난현장에는 추모비가 두 개 있고, 매년 주민들이 그곳을 청소하고, 박 씨의 산이라고 추모하고 있습니다. 박경원은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에서는 모르는 것을 일본 사람은 소중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해 주면 좋겠습니다.
인간은 두 번 죽는다고 합니다. 한 번은 그 사람이 호흡을 정지했을 때, 또 한번은 사람들이 잊어버릴 때. 박경원은 한국에서는 죽었지만 일본에서는 살아 있습니다. 나같이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도 알고 있고, 아타미시에는 상이 만들어져 있어 박경원은 영원히 살아가겠지요. 역사를 잊어버린 민족은 사라진다고 누군가가 말했습니다만, 소중히 해야 할 것은 역시 소중히 해야겠지요.
나는 박경원의 상을 세울 의지는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만약 내가 못하면 박경원을 잘 아는 이유빈 씨가 조국의 위대한 선배를 힘을 합쳐 그 위대함을 한국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서라도 그 위업을 남겨주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포토더보기▶

일본 워커즈 코프 연합회, "태양회 방문 환영"(2)

일본 워커즈 코프 연합회, "태양회 방문…
by 관리자

일본 워커즈 코프 연합회, "태양회 방문 환영"(2019.3.25.)

워커즈 코프 연합회 서울 태양회 방문&n…
by 관리자

기념행사의 이모저모(2018.8.6.)

행복한 순간의 미소​​​​​​​​​​​​…
by 관리자

안중근 의사 순국 108주기 추모식(2018.3.26.)

이사장님, 안중근 의사 순국 108주기 …
by 관리자

[나눔행사] 쌀 기증(2018.2.6.)

[나눔행사] 쌀 기증(노원구 2018.2…
by 관리자

원폭평화전시관 2주년 기념행사(2017.8.6.)

원폭평화전시관 2주년 기념행사봉사단체 태…
by 관리자

(사)평화봉사단 해모음    대표자:고교목남 고유번호 : 778-82-00225 전화 : (02) 934-9828   팩스 : (02) 933-9828   이메일 : csh230@naver.com 주소 : 서울시 노원구 동일로 237다길 16(4층) 후원계좌 : 하나은행 290-910014-95105
Copyright © (사)평화봉사단 해모음. All Rights Reserved.